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포르투갈 왕국 (문단 편집) ==== [[세바스티앙 1세]] ==== 3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세바스티앙 1세]]'''가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할머니인 [[오스트리아의 카탈리나]]가 5년간 [[섭정]]을 맡았으며, 이후에는 에보라 추기경 엔히크([[엔히크 1세]])가 섭정을 맡았다. 섭정단은 세바스티앙이 성년이 될 때까지 왕국을 방어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로 결의하고, 확장 정책을 중단하고 함대를 건조하고 요새를 건설하는 등 국경 방비에 많은 투자가 이뤄졌다. 무슬림들은 브라질과 인도로 항해하는 포르투갈 선박들을 잇따라 습격했고, 1562년 마자강을 공격했지만 포르투갈군에 격퇴되었다.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세바스티앙은 밝고 활기찬 소년이었으며, 키가 크고 날씬하고 금발이었다고 한다. 그는 [[예수회]] 소속 성직자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면서 독실한 [[가톨릭]] 신앙을 갖췄으며, 허리띠에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서 사본을 항상 차고 다녔고, 어린 왕이 경건한 자세를 유지하도록 감독하는 테아티노회 [[수도자]] 2명과 항상 동행했다고 전해진다. 1568년 11살의 나이에 코르테스에서 친정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한 세바스티앙은 그해 코임브라 대학에서 의학 또는 약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불했으며, 프랑스와의 식민지 쟁탈전에서 공적을 세운 브라질의 원주민 우두머리인 아라리보이아에게 구아나바라 만 인근의 영지를 수여했다. 1569년 두아르트 누녜스 데 레앙에게 왕국의 모든 법률과 법적 문서를 종합하여 <세바스티안의 법전>으로 편집하도록 명령했다. 1569년 리스본에 전염병이 창궐해 많은 이가 사망했다. 세바스티앙은 [[의사]]들이 전염병과 싸우는 것을 돕기 위해 세비야의 의사들을 리스본으로 보냈으며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2개의 병원을 리스본에 세우게 했다. 또한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과부와 고아를 구제하기 위해 '산타 마르타의 쉼터(Recolhimento de Santa Marta)'와 '어린이 쉼터(Recolhimento dos Meninos)'를 설립하고 아기들을 돌보기 위해 유모를 제공했다. 1570년 브라질에 정착한 포르투갈인들에게 그곳의 원주민들 역시 자신의 백성이니 노예로 삼지 말라고 명령하고 포로로 잡혀 있는 원주민을 석방하라고 명령했다. 이 무렵, 프랑스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자신의 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세바스티앙을 결혼시키려는 계획을 추진했지만, 세바스티앙은 그녀가 [[장 칼뱅]]을 추종하는 [[위그노]]들을 제대로 탄압하지 않는다고 여겨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중에 교황 특사들이 "이단인 [[나바라 왕국|나바라]] 왕자 [[앙리 4세|헨리케]]와 마르그리트의 결혼을 막아야 한다"고 설득하자, 그는 이를 받아들여 마르그리트와 결혼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미 헨리케 왕자와 마르그리트를 결혼시키기로 마음먹은 카트린 왕비는 이를 거절하고 1572년 마르그리트와 헨리케의 결혼식을 거행했다. 1573년 [[아폰수 1세]]가 [[무라비트 왕조]]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오우리케 전투를 기리기 위해 카스트로 베르데에 왕립 대성당을 건설하게 했으며, 1576년 공동 곡물창고(Celeiros Comuns)를 개장하게 해 수확량이 저조해서 궁핍해진 농민들에게 종자와 상품을 빌려주게 하고 그들이 적자에서 회복되면 농산물로 빚을 갚게 했다. 1577년에는 변호사, 서기관 및 기타 법원 공무원이 고의로 판결 집행을 미루는 것에 벌금을 부과하고 행정 처리를 보다 신속하게 하기 위해 <세바스티앙의 조례>를 반포했다. 이렇듯 어린 나이에도 정력적으로 나라를 이끌던 세바스티앙은 주앙 3세가 포기한 모로코의 여러 거점 도시들을 탈환하고 [[사드 왕조]]를 무너뜨려 모로코 전역에 기독교를 전파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그러던 1576년, 사드 왕조의 전 술탄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2세가 포르투갈로 망명해 술탄 직위를 찬탈한 아부 마르완 아브드 알 말리크 1세를 타도하고 자신을 복위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세바스티앙은 자신의 꿈을 실현시킬 기회가 왔다고 여기고, 1577년 성탄절에 과달루페에서 숙부 펠리페 2세와 대면해 "당신과 함께 이교도를 물리치고 아프리카에 가톨릭을 전파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펠리페 2세는 자신이 직접 가는 것은 거절했지만, 일부 스페인군을 지원해주겠다고 답했다. 1578년 6월 24일, 세바스티앙은 스페인에서 온 2,000명의 병사와 독일과 플랑드르에서 온 3,000명의 용병, 600명의 이탈리아 병사가 가세한 23,000명의 병력을 소집한 뒤 500척의 함대에 탑승시킨 후 리스본에서 출항했다. 이후 탕헤르에 상륙한 뒤 아르질라를 거쳐 [[페스]]를 향해 천천히 남하했다. 그러다가 [[크사르 엘케비르]] 인근의 와디 알 마카진에서 아부 마르완 아브드 알 말리크 1세와 동생 [[아흐마드 알 만수르]]가 이끄는 사드 왕조군 5만 명과 맞닥뜨렸다. 이후 벌어진 [[크사르 엘케비르 전투|크사르 엘케비르(와디 알 마카진) 전투]]는 포르투갈 왕국의 재앙이었다. 8천 가량의 포르투갈군이 전사하고 15,000명이 포로 신세로 전락했으며,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2세는 도주하다가 강물에 빠져 익사했다. 전세가 완전히 기울자, 포르투갈 귀족들은 왕에게 어서 피하거나 항복하여 목숨이라도 부지해야 한다고 권했다. 그러자 그는 단호히 답했다. >"전우여, 진정한 자유는 삶을 버림으로써 이룰 수 있노라!" 그리고는 적진을 향해 말을 몰아 뛰어들었고, 이후에는 종적이 묘연해졌다. 훗날 포르투갈 왕위에 오른 [[펠리페 2세]]는 모로코에서 그의 유해를 인도받고 리스본의 벨렘에 있는 예로니모 수도원에 안장했다고 주장했지만, 많은 이들은 그 시신이 세바스티앙의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렇게 세바스티앙이 후사를 낳지 못한 채 사라지자, [[마누엘 1세]]의 아들이자 [[주앙 3세]]의 동생이며 평생 성직자로 살아갔던 [[엔히크 1세]]가 포르투갈의 새 국왕으로 등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